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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의대 교수 윤상혁, 은혜와 헌신으로 쓴 북녘 땅 감동 실화

by gospel79 2025.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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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은혜, 북녘 땅에서의 삶: 윤상혁 교수 간증 상세 정리

오늘 우리는 특별한 시간을 통해, 평양 의과대학 교수이자 척추 및 소아 행동 발달장애 치료 연구소 공동 소장으로 북한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윤상혁 교수님의 놀라운 간증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직 접하지 못했을, 그러나 편집실에서 은혜를 받았다는 보석 같은 간증들을 모아 새롭게 몰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과연 윤상혁 교수님은 어떻게 북한이라는 낯선 땅에서, 그것도 의과대학 교수로서 사역하게 되셨을까요? 지금부터 교수님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통해, 그 궁금증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북한으로 향한 특별한 부르심

윤상혁 교수님은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 국적을 가진, 조금은 특별한 이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북한에서의 삶, 과연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교수님께서는 2007년부터 현재까지 평양에서 의사로서, 또 연구소 소장으로서 활동하고 계신데요, 그 시작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교수님께서는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북한에 들어가 살 수 있는 자격을 1차적으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북한 생활은 벌써 2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단순히 거주하는 것을 넘어, 평양 의학 대학에서 재활의학과 교수로, 그리고 척추 및 소아 행동 발달장애 치료 연구소 공동 소장으로 헌신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북한에서의 삶이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2017년, 오토 웜비어 사건 이후 미국 정부는 북한에 거주하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고, 교수님 가족 또한 어쩔 수 없이 북한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교수님께서 북한에서 수행했던 인도주의적 활동들을 미국 정부가 인정하면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녀들은 미국 정부의 허락을 받지 못해, 어른들만 북한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교수님과 사모님은 번갈아 가며 북한에 들어가 사역을 이어갔고, 2019년 12월까지 북한에서의 사역은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현재는 북한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교수님께서는 북한에서의 삶을 통해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책, "사랑으로 길을 걷다" 에 담아내셨습니다. 본인들의 경험을 한국 교회와 나누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북한 사역에 대한 부담감 속에서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쉽지 않게 책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책 출간 또한 사역의 연장선으로 생각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어린 시절,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삶

지금은 평양 의대 교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윤상혁 교수님의 어린 시절은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히려 "공부 못하는 아이" 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다고 회상하시는데요, 과연 교수님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요?

교수님께서는 어린 시절, 늘 "나머지 공부" 를 했던 학생이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십니다. 구구단을 제대로 외우지 못해, 시험 시간 안에 문제를 다 풀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하시는데요, 당시에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훗날 장애 아이들과 함께 일하면서 "난독증"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린 시절 자신의 어려움이 난독증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늘 혼나고,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어린 시절. 하지만 교수님의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대 수학과 과외 선생님을 붙여주셨고, 분수를 가르치기 위해 사과를 잘라가며 열정적으로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과외 덕분이었을까요? 분수 시험에서 처음으로 "종이 안 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답을 다 썼다는 기쁨에 백점을 예상했지만, 며칠 후 받아든 시험지는 충격적인 "빵점" 이었습니다. 기대했던 칭찬 대신, 어머니의 매서운 회초리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날 이후 "공부는 내 길이 아니구나" 라는 어머니의 선언과 함께, 교수님은 수영부로 보내지게 됩니다.

3. 수영 선수에서 의사로, 그리고 북한 선교사로

공부 대신 시작한 수영, 하지만 그곳에서 뜻밖의 재능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들은 어렵다는 배영을 쉽게 배웠고, 배영 선수로 활동하며 전국 대회에서 메달을 딸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수영 선수로서 승승장구하던 교수님, 하지만 인생의 방향은 또 다시 바뀌게 됩니다.

인천에서 잘 나가던 수영 선수였지만, 서울 체육중학교, 고등학교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기숙사 생활 중, 늘 건강하셨던 어머니가 점점 아파 누워계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당시에는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없었지만, 훗날 어머니가 "루푸스" 라는 희귀병을 앓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머니의 투병 생활은 교수님에게 큰 슬픔과 아픔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80년대 후반,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경배와 찬양 집회에 참석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특히 "너 어디 가든지 순종하라" 라는 찬양 가사는 교수님의 마음 깊이 새겨졌고, 이후 선교사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체육인 선교 세미나에서 겪었던 특별한 경험은 교수님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세미나 마지막 날, 목사님의 질문,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다른 나라로 보내 선교사로 부르신다면, '네' 라고 대답할 사람 앞으로 나오라" 는 외침에, 교수님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던 그 순간, 교수님의 인생은 북한 선교사의 길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지만,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는 막막했습니다. 수영 선수 출신이었던 교수님은 "수영 코치" 로서 선교지에 가겠다고 결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른 길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라" 는 마음을 주셨고, 그 마음은 "의료 선교사" 라는 새로운 꿈으로 이어졌습니다.

의료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의사가 되어야 했고,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난독증으로 공부와는 담을 쌓았던 과거, 하지만 교수님은 불가능해 보이는 "의대 진학" 에 도전하기로 결심합니다. 주변의 만류와 걱정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4. 미국 유학, 그리고 운명적인 만남

미국 유학,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그곳에서 인생의 동반자이자 사역의 동역자를 만나게 됩니다. 낯선 땅에서 언어 장벽, 문화 차이, 경제적 어려움 등 수많은 어려움과 마주했지만, 교수님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려움 속에서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며 의사의 꿈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미국 유학 생활은 영어 공부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랭귀지 스쿨에서 영어 공부에 매진했고, 주중에는 공부,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힘든 유학 생활을 이겨냈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난관은 "토플" 점수였습니다. 의대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토플 500점 이상을 받아야 했지만, 12번의 시험에도 불구하고 목표 점수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우연히 방문하게 된 "올리벳 나사렛 대학교" 에서 기적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캠퍼스를 방문했을 때, 왠지 모를 이끌림을 느꼈고, 입학 상담 담당자와의 상담에서 자신의 간절한 꿈과 신앙 여정을 진솔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놀랍게도 담당자는 교수님에게 "조건부 입학" 을 제안했고, 교수님은 꿈에 그리던 의대 진학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기적처럼 의대에 입학했지만,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학업" 이었습니다. 난독증 때문에 책 읽는 것조차 어려웠고, 영어로 된 의학 용어들은 더욱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밤낮으로 공부에 매달렸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가며 힘든 의대 과정을 이겨냈습니다.

힘든 유학 생활 중, 교수님에게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내" 였습니다. 같은 학교, 같은 과에 재학 중이었던 아내는 한국 선교사 자녀였고, 한국 문화에 익숙한 미국인이었습니다. 특히 아내는 15살 때부터 "북한 선교" 에 대한 비전을 품고 있었고, 교수님과의 만남은 두 사람의 인생을 북한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아내는 교수님에게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북한으로 보내라고 하시면, 당신은 갈 수 있겠냐" 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교수님은 북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거부감이 있었지만, 아내의 간절한 기도와 확신에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면 가겠다" 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은 단순한 약속이 아닌, 두 사람의 인생을 북한으로 향하게 하는 운명적인 서약이었습니다.

5. 북한에서의 사역 시작, 그리고 놀라운 만남

결혼 후, LA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던 교수님 부부, 하지만 북한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점점 더 강렬해졌습니다. 우연히 컨퍼런스에서 만난 북한 사역자의 간증은 교수님 부부의 마음을 다시 한번 흔들었고, 결국 2007년, 교수님 가족은 북한 땅을 밟게 됩니다.

2007년, 북한 땅을 처음 밟았던 날, 교수님은 잊을 수 없는 감격과 긴장을 느꼈습니다. 중국을 거쳐 함경북도 나선시로 들어가는 길, 두만강을 따라 이어지는 낯선 풍경 속에서, 교수님은 북한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하지만 북한 세관에서 만난 안내원들의 밝은 모습은 교수님의 마음속에 있던 막연한 두려움을 씻어내고, 북한 사람들도 똑같은 "사람" 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북한에서의 첫 진료, 기대와는 달리 "노인 환자" 들만 찾아왔습니다. 젊고 건강한 환자들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고령에 지병을 가진 환자들이 대부분이었고, 교수님은 실망감과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첫 환자의 치료 후,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10분 걷다 허리가 아파 주저앉던 노인이, 교수님께 치료받고 쉬지 않고 집까지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환자들의 입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교수님의 치료실은 점점 더 많은 환자들로 북적였습니다. 그 중에는 8년 동안 팔을 쓰지 못했던 "오십견" 할머니도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아픈 팔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할머니의 팔이 거짓말처럼 올라간 것입니다. 그 순간, 교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온 몸으로 느꼈고, 북한 땅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팔이 올라가는 기적을 통해, 교수님은 북한 땅에서 만난 하나님을 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삭막하게만 느껴졌던 북한 땅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했고, 북한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교수님은 북한 사람들을 향한 더욱 깊은 사랑과 헌신을 다짐하게 됩니다.

6. 척추 치료에서 소아 재활로, 사역의 확장

척추 질환 치료를 위해 북한에 갔지만, 예상치 못한 "소아 재활"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2012년 1월, 한 할머니가 뇌성마비 손녀 "복신이" 를 업고 교수님의 치료실을 찾아왔습니다. 복신이의 심각한 상태를 보고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뇌성마비 치료 경험이 없었던 교수님은 난감했습니다. 하지만 복신이를 외면할 수 없었던 교수님은, 복신이를 위한 치료를 시작했고, 복신이의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는 것을 보면서, 뇌성마비 치료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복신이 치료를 계기로, 교수님은 소아 재활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한국에 돌아와 뇌성마비 재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12년, 평양 의학대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북한에서 소아 재활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평양 의대에서 뇌성마비 아이들을 치료하면서,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뇌성마비로 9년 동안 걷지 못했던 "박우인" 이라는 아이가, 교수님의 치료를 받고 1년 만에 걸어서 퇴원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인이의 기적은 북한 전역에 알려졌고, 조선중앙방송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방송 이후, 북한 전역에서 뇌성마비 아이들이 평양 의대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교수님의 소아 재활 사역은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하지만 복신이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치료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간 복신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복신이의 죽음은 교수님에게 큰 슬픔과 아픔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북한 소아 재활 사역에 더욱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복신이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교수님은 북한 소아 재활 시스템 구축에 더욱 힘쓰게 됩니다. 평양 의과대학 병원장과의 협력을 통해, 북한 최초로 "소아 재활 의학과" 를 설립했고, 뇌성마비 진단명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또한 뇌성마비 아동들을 위한 특수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등, 북한 소아 재활 분야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7. 아이들을 향한 사랑, 그리고 입양

소아 재활 사역을 통해, 장애 아동뿐 아니라, 그 가족들의 아픔까지 함께 느끼게 되면서, "입양" 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됩니다. 장애 아동 부모들의 고통을 보면서,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고, 아내의 오랜 꿈이었던 "입양" 을 실천하기로 결심합니다.

태국 컨퍼런스에서 만난 장애 아동 입양 선교사의 이야기는 교수님 부부의 마음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습니다. 12명의 아이들을 입양하여 키우는 선교사 부부의 모습에 감동받아, 그 자리에서 입양을 결심했고, 중국에서 뇌성마비를 앓고 있던 "야곱" 을 입양하게 됩니다. 야곱은 교수님 가정에 입양된 후, 건강을 회복하고 밝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넷째 야곱 입양 후, 첫째 딸 "사라" 의 제안으로 "다섯째 입양" 을 결정하게 됩니다. 사라는 말씀 묵상 중, 하나님께서 다섯째 입양을 기뻐하신다는 마음을 받았고, 가족 회의를 통해 루마니아에서 선천성 장애를 가진 "루지아" 를 입양하게 됩니다. 루지아 또한 여러 차례 수술과 재활 치료를 거쳐, 의족을 착용하고 씩씩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다섯 아이의 부모가 된 윤상혁 교수님, 하지만 여전히 북한 소아 재활 사역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NGO 단체 "선양 하나" 를 설립하여, 북한 장애 아동들을 위한 지속적인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8개국 39명의 봉사자들과 함께 북한 사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간증은 우리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 그리고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헌신과 사랑, 그것이 바로 윤상혁 교수님의 삶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교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또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하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8. 마치며

오늘 우리는 윤상혁 교수님의 놀라운 간증을 통해, 북한 땅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어려움과 난관을 딛고, 의사의 꿈을 이루고, 북한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된 교수님의 삶은, 우리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특히 뇌성마비 아동들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과, 다섯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는 따뜻한 마음은,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귀한 본보기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북한 사역이 잠시 멈춰있는 상황이지만, 교수님의 북한을 향한 사랑과 헌신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희 또한 교수님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며, 북한 땅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오늘 귀한 간증 나눠주신 윤상혁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윤상혁 교수님의 간증을 통해,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하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다시 한번 소망하며, 오늘 방송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새롭게 하소서, 다음 주에도 더욱 은혜로운 간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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