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건하게 서십시오
오늘도 주의 말씀으로 승리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시대가 너무나 악합니다. 코로나가 다시 참고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말씀으로 무장되어서 굳건하게 세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앞에 있는 분들에게 힘찬 목소리로 한번 이렇게 권면하겠습니다. “굳건합시다.” 아멘. 굳건하십시다.
오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의 말씀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거짓 교사들 때문에 영적으로 점점 병들어 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거짓 교사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냐 하면, 율법주의자들, 다시 말해서 할례당이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할례당이라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냐면, “무조건 할례를 받아야지만 구원을 받는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강조한 것은, “할례를 받은 자는 절대로 지옥에 가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더라도 그들에게 할례를 무조건 받아야지만 지옥에 가지 않으며, “기도나 구제, 선행은 소용없다.”라고 가르치던 집단이 바로 할례당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례당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가서, 갈라디아 교회를 또 어지럽게 하고 있었던, 그 미혹된 상황 가운데 사도 바울이 편지를 썼던 것이라고 우리가 보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5장의 말씀은 이런 율법에 얽매여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할례당에 대해서 직설적으로 사도 바울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5장의 키워드를 뽑아 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유와 성령”. 이 ‘자유와 성령’이라는 키워드를 좀 가지고 우리가 함께 말씀을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5장 1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아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처음부터 우리에게 결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걸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의 멍에를 메면 안 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
그런데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우리의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받아들인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삶에서 풀어내는 것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마치 제가 이제 공부를 하거나 이제 수업을 들었을 때, 저에게 수업을 가르쳐 주던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치지 못하면, 그것은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혹여나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염탐꾼일 것입니다. 다 알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내 삶 가운데 과연 영향력이 있느냐?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나에게 영향력이 있어서, 그 영향력을 가지고 내가 가정과 모든 영역과 직장과 모든 곳에서 내가 그 열매를 맺고 살아가느냐? 이것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일단 굳건히 서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굳건히 서 있어야 합니다. 굳건히 선다는 것은, 그냥 고집이 센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아이들 말로는 ‘꼰대’라고 하죠. 그런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심지가 굳건히 있어서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할례당으로 인해서 힘들었습니다. 고린도전서, 우리가 전에서, 지난 번까지 고린도전서를 배웠죠. 고린도전서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의 그 사도성을 공격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사도 바울을 공격했다고요?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다르니까, 사도 바울의 권위를 낮춤으로써 그들의 권위를 세우려고 사도 바울의 사도성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실 갈라디아 교회도 사도 바울의 사도성으로 인해서 공격을 끊임없이 받던 교회였습니다. 미혹된 생활, 알지 못하는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 선택할 수 있는 능력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체로 만드셨습니다. 아멘이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또한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격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강제로 로봇이나 AI처럼 알고리즘을 넣고 무슨 칩을 넣어 가지고 “너는 나를 무조건 사랑해.” 이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유와 그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원하시는 그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가 죄로 인해서 끊어졌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서 그 자유가 끊어졌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어떤 권리가 주어진 것입니까?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는 능력과 또다시 범죄를 취할 수 있는 그 능력이 있는 것인데, 이 죄를 범할 수 있는 이 능력 가운데서 우리에게 이미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신, 구원이라는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그 구원을 다시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부터? 미혹된 세상으로부터. 여러분, 굳건하시길 바랍니다. 미혹된 세상으로부터 다시 한번 더 일어나시길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 또 그 자유에서 어떻게 굳건하게 설 수 있을까요? 오직 자유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아멘이시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자유
예수님은 우리를 노예 상태에서, 영적 노예 상태에서, 죄악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노예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몸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무엇이냐면, 몸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무엇이죠? 사망입니다. 사망은 무엇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어떤 금은보화로도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생명으로만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것인데, 어젠가 그제인가 저희 담임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과연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굳이 그 십자가, 구원을 이루셨을까? 십자가로 안 하셔도 그분이 구원하시겠다면, 사실 구원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거든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십자가를 통해서,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을까요? 그게 바로 사랑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기도 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공의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그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그 죄값을 지불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 하나님의 약속을 깨 버리고 어기신다면, 그 하나님과 우리의 영적인 신뢰 관계는 깨져 버리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우리 가운데 맺어진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그 십자가라는 것을 우리 가운데 이루신 것입니다. 그걸 통해 우리 가운데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유익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아멘이십니까? 우리 한번 따라해 봅시다. “예수님이 우리의 유익이 됩니다.” 아멘. 정말 예수님이 우리의 유익이십니다.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
그런데 2절을 살펴보면, 우리 2절 다 함께 읽어볼까요?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로 할례를 받으면 우리의 죄 값, 구원받은 것들, 다 끝나는 것일까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진짜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기를 소망하는데, 우리 3절에 힌트가 있습니다. 우리 3절의 말씀 또한 다시 한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 그 교회의 공식적인 교인이 됩니다. 그렇게 되듯이, 할례를 받게 된다는 것은 유대교에 입교하는 공식적인 유대인이 된다는 것인데, 만약에 우리가 할례를 받으면, 우리도 유대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면,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세례 받으실 때 세례 교육 받으셨죠? 기억나십니까? 우리가 해야 되는 것들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 중에 한 가지만 대답해 보십시오. 성찬, 여러 가지들이 있겠죠. 그런데 그런 것처럼 우리가 할례를 받게 되면, 유대인으로서 꼭 해야 될 의무가 있는데, 우리는 그 성도로서 수많은 의무들 중에 한 가지씩 이렇게 하시잖아요. 그런데 유대교, 유대 율법은 율법 중에서 수많은 것들 중에 한 가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를 무조건 해야 될, 행해야 될 의무를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평생 율법을 다 지키다가 죽기 직전에 율법 하나를 어겼습니다. 실수로. 그러면 그 사람 어떻게 된 것일까요? 구원받지 못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따지면.
오직 예수,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야고보서 2장 10절, 우리 다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결국 할례는 세례를 무효화시키며,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얻게 된 칭의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 교회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구원받은 자다.”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있는데, 할례당들이 와서 “할례 받아야 된다. 너 할례 받아야지만 구원받는다.” 이런 미혹된 것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너무나 순결하고 정결한 것이어서, 오직 예수 외에 다른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사도 바울은 이 말씀 중에 다시 한번 더 강조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는데, 그 할례당의 말대로 다시 할례를 받으라고? 야, 생각해 봐라. 할례, 할례는 모든 율법을 지켜야 되는데, 모든 율법은 하나라도 범하게 되면, 너희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다. 너희가 그런데 율법을 지킬 수 있니? 너희의 능력으로 율법을, 모든 것들을 행할 수 있니? 너희의 행동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니?” 이 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의롭다 한들, 내 입에서 욕 한 번도 안 나오고, 내 입에서 짜증과 분노의 소리가 한 번도 안 나갈지라도, 설령 내 손이 어떠한 더러운 것을 만지지 않고, 내 모든 행동과 내 모든 뜻과 내 마음의 모든 중심에,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지라도,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것은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자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단이 왜 이단일까요? 그 이단, ‘다를 이’ ‘끝 단’, 끝이 다르다고 해서 이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예전 교회에서 이제 그, 아이, 청소년 아이들과 수련회를 했는데, 이단 특강 강사님을 모셨습니다. 이번에 저희 이제, 곧, 고등부 수련회가 있습니다. 많은 기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때 이단, 이제 아이들이, 저희 아이들이 특강을 무엇을 듣고 싶냐고 물어보니까, 이단 특강을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단 강사님, 신천지, 이단 강사님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그 강사님이 예전에 제가 한번 다른 교회에서 모셨던 분인데, 그분이 막 교리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도 사실 뒤에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어, 이거 그럴 듯한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단 교리였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우리가 언제든지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단이, 끝이 다르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같아도, 마지막 하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 다른 게 무엇이냐? 바로 결국 무엇과 연결되어 있냐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를 산다는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우리 생전에 예수님의 재림을 볼 수도 있는, 가능성이 그 어떤 세대보다 높은 세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전 세대보다 젊으니까, 그 주님의 오심과 그나마 가까이 살고 있으니까, 어쩌면 우리 생전에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가지게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때가 가까운 만큼, 미혹의 시대를 산다는 두려움도 있는 것 같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둘째치고, 나부터 과연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나부터라도 제대로 된, 마지막 시대에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유익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장 12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죠. 우리 다 함께 선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아멘.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능력을 우리에게 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그의 말씀을 선포하며, 그의 이름으로 성령을 받고, 그의 이름으로 성찬을 하며,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하며 예배하는, 참, 그것들이 참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이와 같이 예배를 드리는 자들에게 구원이라는 유익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믿음으로
그래서 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5절 말씀을 다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아멘. ‘성령으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성령을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갈라디아서 3장 3절은 말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체험했기에, 성령을 받았기에 믿음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망, 희망, 율법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환경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과 희망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솔직히 우리가 미래가 보이십니까? 여러분, 천국 보신 적 있으십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여러분들의 육안으로 이렇게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님, 만져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대화를 나눠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마음의 레마, 영성 말고, 저와 이렇게, 물론 그렇게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제 목소리가 이 귀로 들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내 딸아!” 이렇게 들려온 적이 있으십니까? 사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실제로 볼 수도 없고, 만져 볼 수도 없고,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었고, 그 보이지 않는 천국, 모든 것들이 두려워서, 모든 그 어떤 위대한 성자들도 그 내세에 대해서 정확히 말해 주지 못한 상황 가운데서, 오직 천국이 있다고 말하는 이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말씀에, 그 천국을 어떻게 우리가 소망하며 이 마지막 시대를 이 악물고 버틸 수 있는 것입니까? 무엇입니까? 성령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님이 믿게 하신 것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의 것으로 인정하게 되고, 내가 그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고, 그 십자가로 인해서 나의 삶이 온전히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가정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님이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대인들에게 율법과 할례를 주셨지만, 결국 율법과 할례로 의의 소망을 이룰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도 참 재밌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아니, 주셨으면 알게 해야죠. 주셨으면 행할 능력을 주셔야죠. 환경을 주셔야죠. 그런데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으면서 율법을 행할 능력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했을까요?
신명기 29장 4절, 말씀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명기는 율법이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기록된 책인데, 이 율법을 깨달을 수 있는 눈과 마음과 이 모든 것을 주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지 않은 것들이 오랜 시간 지속되었습니다. 예수님 오실 때까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오랜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율법이 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례가 답이 아니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모든 것들이 답이 아니고, 오직 성령님만이 답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 성령이 정답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으셔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보증이 되셔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시켜, 부활의 때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우리를 바꾸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6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다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그 사랑이 우리의 굳건한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이 더 깊은 차원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인, 서로 사랑하는 자
그런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을 바로 ‘자유인’이라고 말합니다. 자유가 다른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13절을 통해 다시 한번 더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 13절의 말씀입니다.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그러면서 이어서 14절에 말씀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아멘. 결국 무엇입니까? 이 14절의 말씀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인답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성도들끼리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셔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그 거짓 교사들로 인해 갈라진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다시 하나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안에서, 사랑 안에서 거하는 것이라고 다시 한번 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성령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결국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성도를 사랑하고 서로를 아껴 주며 하나 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될 마땅한 일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 성령의 열매
사랑하는 성도님들, 보십시오. 모세의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냐면, “살인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될 최소한의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살인하는 것, 쉽습니까? 우리는 상상도 못 합니다. 그런데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마음으로 그 사람을 증오한 사람은 살인한 자다. 그러니까 율법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형태를 말해 주고 있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은 무엇이냐면, 인간이 해야 될 최대치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 식으로 다시 표현하자면, 율법은 초등학생 정도가 해야 될 능력을 말해 주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계명은 성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될 것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의 삶은 초등학생들의 수업도 사실 버겁습니다. 초등학교 때 가르쳐 주는, 우리 가운데 도덕이라는 책이죠. 윤리, 이것들 다 기억나십니까?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윤리, 다 지키고 계십니까? 잘 못 지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인급의 말씀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이것도, 사실, 어려운데, 율법도 못 지키는데, 최소한의 율법도 못 지키는데, 예수님의 계명은 어떻게 지키라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도 율법을 못 지켜서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계명, 더 높은 수준을 어떻게 지킬 수 있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옆에 있는 성도, “어, 너무 예쁘다. 어, 파마가 너무 잘 됐어요.” 이렇게 말은 하지만, 솔직히 그 안에서 진심이 나오기도 하지만, 얼마나 진심이 들어가 있습니까? 옆에 있는 성도의 자녀가 서울대에 들어갔습니다. 대기업에 들어갔습니다. “어, 할렐루야. 너무 잘 됐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 배는 어떻습니까? 내 아이는, 우리 아이는, 집에 딱 들어갔더니 배나 긁적긁적, TV나 보고 있고, 컵라면이나 끓여 먹고 있고, 그런데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냐고요. 속으로 질투하는 것들조차도 하나님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버리고, 내 형편과 내 생각과 내 뜻과 내 방법대로 살아가야 합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22절과 23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인데, 우리 22절, 23절, 우리 다 함께 한 목소리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되는데, 성령의 열매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 삶 가운데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으로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이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미련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 너무 미련해 보입니다. 오래 참으래요.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오래 참으면, “너, 왜 말을 안 해? 내가 가만히 있으니 가마니로 보이나? 내가 보자보자 하니 보자기로 보이나?” 사람들은 나를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무엇입니까? ‘역’으로 ‘지’랄을 해야, 사람은 ‘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안다. 이게 요즘에 나오는 역지사지라고 합니다. 남이 뭐라고 하면 큰 소리 내라는 것입니다. 참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으면 미련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세상이 보기에 뭔가 미련한 것들을 다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냐고요. 답은 딱 한 가지입니다. 성령 받는 것. 성령을 더욱더 사모하는 것. 어제 받은 성령으로 내가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더 깊은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이제 오늘날 이 시대는, 이전에 우리 선배들이 받았던 성령보다 더 큰 은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더 큰 성령이 필요하고, 더, 더, 더 능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어쩌면, 더 악하니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너무나 멀어지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5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 말씀을 선포하고 우리 좀 말씀을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믿음을 가지고 강하게 한번 선포해 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아멘. 유일하게 살 수 있는 방법,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성령으로 산다는 게 무엇이냐면, 성령님과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내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굳건히 설 때, 내가 굳건히 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굳건히 서서, 내 모든 자아와 생각과 모든 것들이 죽어지고, 오직 하나님 앞에 일치하는 것, 내가 하나님께 맞추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굳건히 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절대 자유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이 우리의 자랑이 아니기를 소망합니다. 미련해 보이는 사랑이 우리의 자랑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미련해 보이는 이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자랑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칭찬은 우리 하나님께 드립시다. 우리 저 천국에 가서 우리 하나님께 칭찬을 들을 생각을 하고, 우리는 때로는 욕을 먹고,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할지라도, 굳건히 서서 성령으로 행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우리가 함께 기도하기를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 우리 성령님을 더 갈망합니다. 우리 찬양한 대로, 빈들에 마른 풀같이 성령의 단비를 내리시듯, 하나님, 내 마음이 갈라져 있고요, 열매도 없고요, 메마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시 성령의 단비를 기다립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 이상 미혹된 세상 가운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굳건히 서서 자유인답게, 서로 사랑하며 성령의 열매 맺는 나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이 시간 우리 주님 한번 부르짖으면서, 소리 내어 간절히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이 시간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하나님, 우리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더 이상 율법과 나의 행위와 내 미혹된 것에서 기준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굳건히 서서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성령의 열매로 말미암아 내 가정이 변화되게 하여 주시고, 내 자녀가 변화되게 하시고, 내 모든 삶이 성령의 열매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모든 영역 가운데에 주님의 뜻만이 온전히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모든 영역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만이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모든 것 가운데 온전히 주님, 영광만이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모든 칭찬은 저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 들을 각오를 하며 온전히 주님의 길을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주님 앞에 주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하나님, 우리 가운데 주님의 뜻만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합니다.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성령으로 말미암아 굳건히 서서 자유인이 되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율법도 지키지 못하는데, 율법보다 더 큰 하나님의 그 새 계명을 우리가 지킬 능력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성령을 더욱더 보내 주사, 성령의 충만함이 있게 하사, 하나님, 우리의 모든 영역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시고,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더욱더 주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성령을 구합니다. 하나님, 충만케 하여 주시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 주시옵소서. 찬양하오며,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살아 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글을 보고 계신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계시다면, 지금 바로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세주이자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영접 기도문을 진실된 마음으로 따라 읽으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그동안, 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르고, 부인하고, 제 맘대로 제 뜻대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저의 죄를 회개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지었던 분노, 시기, 질투, 음란, 혈기, 용서 못함, 분쟁, 시기, 미움, 다툼, 욕심 나의 모든 죄를 눈물로 회개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이 용서하여 주세요.
이제 하나님 떠나 방황하며 고통하던 저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저의 구세주로 저의 그리스도로 저의 삶의 주인으로, 제 맘 속에 진심으로 영접합니다.
지금 제 마음 속에 성령으로 들어오사, 영원히 다스려주시고 책임져 주시고 인도해 주옵소서. 날마다 회개하며, 세상 욕심 버리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모든 계명을 철저히 지키고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절 구원하심을 믿고,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 바로 가까운 교회에 꼭 등록하시고, 매일 회개하고 순종하면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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