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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

7.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모순

by gospel79 2012.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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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공의롭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에서 고문할 수 있는가?

 

사람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하면, 결국 하나님이 '죄'와 '악'의 창시자가 아닌가? 차라리 애초부터 '죄'와 '악'을 만들지 않았다면, 사람도 지옥에 갈 이유가 없지 않는가?
하나님이 공의롭고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신이라면, 대체 이 세상에는 왜 수많은 고통과 부조리가 존재하는가? 왜 세상에는 끔찍한 범죄와 전재, 자연재해와 재난, 불법이 끊이지 않는가? 왜 정직하고 선하게 살지만 비참하게 사는 사람이 존재하고, 온갖 악과 불의를 저지르면서도 안락하고 즐겁게 사는 사람이 존재하는가?

지금까지 왜 성경과 복음이 단순한 '종교적 허상'이 아닌 역사적, 과학적 '진실'인지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설령 여러분이 이러한 검증과정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만일 정말로 하나님이라는 신이 존재하고 그 분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수많은 사람을 지옥에서 고문할 수 있는가?'

'애초부터 죄라는 것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런 골치 아픈 문제가 없지 않았겠는가?'

'왜 하나님은 세상의 수많은 고통과 부조리를 멍하니 지켜보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해결하지 않는가?'

라는 의문일 것입니다. 어찌보면, 이 모든 속성이 공의와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속성과 완전히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이라는 신은 사랑보다는 고문과 고통을 좋아하는 잔인한 신인 것 같아보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은 서로 다른 질문 같아보이지만, 사실 그 근본을 살펴보면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들은 '하나님'이라는 신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알면 의외로 쉽게 풀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 난제를 풀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유 의지'를 주셨다

한가지 질문을 해 볼까요? 여러분은 만일 여러분이 퇴근해서 집에 돌아왔을 때, 그 어떤 경우라도 예외 없이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어 인사하는 '인사 로봇'과 때로는 TV 보는데 정신 팔려 쳐다보지도 않거나 칭얼대면서 울기도 하지만, 가끔씩 해맑게 웃으면서 여러분께로 달려가는 '아기'중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아무리 '인사 로봇'이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안녕하세요, 주인님? 일하느라 피곤하셨죠? 사랑합니다~'라고 백날천날을 외친다 한들 여러분들은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매일 생떼를 쓰고 징징대도 가끔씩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아빠'를 외치며 기어오는 아기에게 사랑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아기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고, 로봇은 자유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로봇은 원래 그렇게 하도록 '설계'가 된 것이기 때문에 로봇이 아무리 열심히 인사를 해도 기분이 좋을 이유도 없고, 또한 설령 로봇이 아무리 심한 욕설을 퍼부어도 화가 날 이유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자유 의지를 가진 아기는, 아빠를 거부할 수 있는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에게 달려가서 안기기 때문에 아빠는 사랑과 감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얼마든지 '자유 의지'를 박탈한 채로 기계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존재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죄'라는 것을 결코 짓지 않고 기계적으로 선한 일만 하거나 하나님을 그 어떤 상황에도 찬양하면서 악을 행치 않는 감정과 인격이 없는'기계'로 얼마든지 만들 수가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그런 존재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경배를 받기 원하지 않으시고, 마치 우리처럼, 하나님을 얼마든지 부인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경배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 의지의 산물 - '선과 악'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하나님은 '악'을 창조했느냐라고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하나님께서는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악'이 존재할 '가능성'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에서 일방적으로 악을 행하도록 '설계'하지 않았고, 항상 선과 악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어떤 사람이 길에서 강도를 당해서 피를 흘리고 쓰러진 것을 보았다고 가정합시다. 여러분은 여러분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 사람을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도록 선행을 베풀 수 있습니다. 반면, 내 일이 아니라고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많지는 않겠지만, 심지어는 피를 흘리는 이 사람의 지갑을 훔쳐 도망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심지어는 하나님마저도 특정한 선택을 여러분에게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여러분의 선택에 달린 문제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러한 '자유 의지'의 결과로 인해 필연적으로 '선'과 '악'이 갈리게 되고, 결국 선과 악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그에 따른 선택의 산물입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 1사람을 도와준 것보다는 10사람을 도와준 것이 더 선하고, 1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보다는 10사람을 죽인 것이 더 악한 것처럼, 선과 악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선과 악은 상대적인 개념이고, 비교 대상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왜 악이 없이 선만 만들면 되지 않느냐라고 반문하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입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누구도 이 자유 의지의 부산물인 '악'이라는 것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악'을 하나님이 강요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에게 모든 의사 결정권을 완전히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생각을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나는 토막살인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사기를 치지도 않았으며, 도둑질도 하지 않았고, 경범죄로 경찰서에 끌려간 적도 없는 양심적인 시민인데 대체 내가 무슨 악을 저질렀다는 것이냐' 라고 말이죠.

 

하지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죄와 악의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어도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기만 해도 죄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 어떤 성자라도 '악을 행하지 않았다'라고 결코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 사망 이후의 심판

인간의 '악'의 산물은 '죄'를 짓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은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죽음이 끝이 아니고 다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심판의 대상은 사람이 살면서 지은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 어떤 사람도 '죄'를 피해갈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한 지옥 형벌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 공의와 사랑

하나님의 속성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의'롭다는 것이고, 하나는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록, 융통성을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록 완벽하게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너무나 하찮고 대수롭게 생각하는 시시한 죄 조차도 그분은 결코 용납을 하시지 못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죄에 대한 형벌을 내릴 수 밖에 없는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한 형벌인 지옥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람들이 많이 오해를 합니다. 아니 무슨 신이 그렇게 속이 좁고 쩨쩨하냐 공의로운 것은 알겠는데, 한편으로는 사랑도 무한하다고 하면 그냥 사랑을 좀 베풀어서 시시한 죄는 통크게 용서해 주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 아니냐라고요.

 

하지만, 사실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공의와 사랑은 논리적으로 절대로 어중간하게 타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이 아기를 너무나 사랑한다면, 인위적인 낙태를 지독하게 미워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아이를 너무나 사랑한다면, 여러분의 아이를 살해한 살인범을 지독하게 미워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의 정도가 더 크면 클수록, 살인범에 대한 증오의 정도도 더 커질 것이고,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의 아이에 대한 사랑이 무한대라면, 살인범과 그의 살인죄에 대한 증오도 무한대일 것입니다. 이 때, 여러분의 아이의 살인 사건의 판결을 맡은 판사가 공의롭지만, 동시에 사랑도 넘치는 사람이라고 가정해봅시다. 판사가 법정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공의로운 판사이기 때문에, 이 살인범의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끔찍한 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사랑이 넘치기 때문에 이 죄를 용서하고 무죄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라고 판결을 내린다면 여러분은 이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까? 결코 인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공의롭기 때문에, 너무나 죄를 미워하기 때문에, 이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물쩡 덮을수가 결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살인범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징역형'이건, '눈물의 사죄'이건 그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이후의 사랑과 용서가 비로소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공의와 사랑은 논리적으로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무한대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결코 인간의 죄를 용납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는 죄값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치르고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고,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이 죄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런 죄를 지을 가능성 자체를 알고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이 저지른 죄악을 담당하실 이유가 전혀 없고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공의롭게 판결내려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친히 인간의 죄악을 직접 담당하신 것입니다.

 

전지 전능하신 신이 자신이 만든 보잘것 없는 피조물의 몸으로 오셔서, 피조물에게 욕설과 비난, 채찍질, 굴욕, 고문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로써, 인간의 죄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고, 인간은 죄로 인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이를 잔인하게 살해한 살인자에게,

'나는 피도 눈물도 없을 정도로 공의롭기 때문에 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당신에게 유죄 판결과 사형을 면하게 할 수 없소. 당신은 무조건 '사형'!' 이라고 판결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피도 눈물도 없을 정도로 공의롭지만, 동시에 사랑도 넘치기 때문에 이번 한 번만은 살인자를 용서해 주겠습니다. 보호자 분은 가슴이 아프겠지만, 팔자려니 생각하고 이해해 주십시오'라고 억지같은 편법을 쓰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방식은 이것입니다.

 

'저는 너무나 공의로운 판사이기 때문에 결코 이 사람의 죄악을 그대로 묵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한 순간의 실수로 소중한 자신의 생명을 희생당하는 것도 결코 원치 않습니다.
보호자께서는 이해가 안가시겠지만, 제가 이 살인자의 죄를 대신 지겠습니다. 저는 아무 죄가 없지만, 이 살인자의 죄를 그 어떤 수단이라도 괞찮으니 제가 대신 지겠습니다.

저를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때리시든, 제 재산을 빼앗건, 분이 풀릴 때까지 침 뱉고 욕설을 하건 알아서 하십시오. 이 짐승같은 살인자 참회하는 조건으로 제가 다시 사람으로 만들겠습니다..
차라리 제가 죄값을 대신 치를테니 이 사람은 용서하고 살려주십시오'

 

터무니 없어 보였고,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분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여러분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살인자 대신 공의롭고 사랑이 넘치는 판사에게 미친듯이 분풀이를 하는 조건으로 살인범을 용서했습니다.

 

살인범은 석방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살인범이 여러분의 부모님을 또 죽였습니다. 같은 재판과 같은 상황이 또 반복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살인범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판사의 제안에 또 따르시겠습니까? 절대 다수는 한 번은 용납하지만 그 이후로는 결코 용납하지 못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여러분이 이 판사의 눈물겨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또 동일한 방법으로 살인범을 처리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가정이지만, 이런 과정이 셀 수 없이 많이 반복되었고, 판사는 그 때마다 자신이 죄값을 받겠다고 하며 눈물로 부탁을 했고, 판사는 몸이 너덜너덜해질 지경까지 여러분에게 구타를 당하며 죄값을 대신 치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한 죄를 짓고, 또 짓고 짓습니다. 만일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이었다면 용서를 할 수 있었을까요? 설령 한 두번은 '내가 대신 죄값을 치르고 용서할테니 다시는 죄짓지 말아라. 그래도 지으면 넌 진짜 지옥이다.' 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아시기 때문에 매일 죄를 짓고 또 지어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또 속아주시고 바보같이 또 죄를 짊어주십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그런데, 만일 이 재판관이 반복적인 살인범에 대한 죄를 무한대로 대신 짊어질 수 있을까요? 이 사랑이 넘치는 재판관은 자신이 죄값을 치르는 대신 이 흉악한 살인마에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새사람이 될 것을 부탁했습니다.

 

살인범은 그 때마다 눈물로 참회를 하고 새 사람이 되겠다고 했지만, 항상 그 죄를 반복하며 지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마다 그 재판관은 자신이 죄값을 대신 치러주었고, 또 회개를 전제로 죄값을 대신 치러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렇게 상식적으로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사랑을 재판관이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살인범이 끝까지 뉘우치치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재판관이 대신 죄값을 치르고, 그것도 끊임없이 반복해서 죄를 지어도 뉘우치기만 하면 항상 죄를 대신 해결해준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죄를 뉘우치치 않는다면, 그 때도 재판관이 이 사람에게 무죄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이는 공의로운 속성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살인범을 본다면 분노가 극에 달해서, '아니 판사가 그냥 공정하게 사형판결을 내려도 아무 문제가 안되고, 심지어 자신이 대신 죄값을 치르고, 그것도 모자라 반복적으로 죄를 지어도 뉘우치기만 하면 자신이 죄값을 대신 치러 주겠다고 하는데도 끝까지 뉘우치치 않는 저 인간은 그 어떤 잔인한 방법으로 사형받아도 싸다'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입장을 바꿔볼까요?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끝없이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는 인정하기 싫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도록 결코 강요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죄와 악은 우리가 선택해서 지었을 뿐이고, 그에 대한 죽음과 심판의 결과는 우리가 져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져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죽음과 지옥의 고통을 우리 대신 그분이 친히 져주셨고, 너희를 지옥에 보내지 않을테니 대신 회개하고 앞으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죄를 지었습니다. 어제도 짓고, 오늘도 짓고...내일도 짓고...사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눈물고 회개하기만 하면 그 때마다 대신 죄를 져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겠다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수준의 사랑을 베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회개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지옥의 형벌을 피할 길과 방법이 완전히 열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끝까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지옥간다면, 이게 과연 불공평한 일일까요? 네...사실 너무나 불공평한 일이기는 합니다. 다만 범죄자인 우리쪽에 너무나 유리할 정도로 불공평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지만, 너무나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고,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더군다나 그 방법은 자신에게는 너무나 굴욕적이고도 치욕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예수 좀 안믿고 회개 좀 안한다고 인간을 지옥에 보낼 수 있어?'라는 질문을 하신다면, 이는 '아니 내가 몇 사람좀 기분 전환용으로 죽였기로서니, 그토록 사랑이 넘치는 재판장님이 어떻게 이 정도 죄를 대충 용서 못하실 수 있습니까?' 라고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재판장은 아무리 흉약한 죄를 아무리 자주 지어도, 회개하고 새 삶을 산다면 자신이 그 모든 무시무시한 죄값을 달게 받겠다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랑을 베푼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이 아닙니까? 어떻게 더 이상의 사랑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래도 끝까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면서도, '죄값'은 면제받기를 원한다면, 이는 논리적으로 결코 불가능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과 사랑이라는 속성이 '죄값'을 치르는 과정이 없이는 결코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간다면, 이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 부족이 아닌 전적으로 여러분의 선택 때문인 것입니다.

너무나 불공평해 보이는 세상

우리는 살면서 세상이 너무나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 잘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풍족한 재산, 학벌, 지위, 외모, 권력을 고스란이 물려받아 풍족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찢어지는 가난과 질병, 신체적인 약점을 안고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갑니다.

 

사필귀정이라는 말도 있고, 죄 지으면 결국 벌받는다 사실을 목도하기도 하지만, 부정하고 약은 방법으로 살아가도 너무나 인생을 풍족하게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직하고 선하게 살면서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신이 있다면 어떻게 이것을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고 그 분이 정말로 공의롭다면 어떻게 이런 불합리와 모순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세상의 삶은 영원한 천국이나 지옥, 즉 영원의 삶에 비하면 한낱 순간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만일, 이 세상의 삶이 전부이고 모든 것이 끝이라면, 이 세상은 지극히 불공평한 세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형통할 수 있습니다. 사기치고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100살까지 행복하게 얼마든지 장수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선하고 정직하게 살면서도 불운하게 단명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삶에 대한 상급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든 말과 행동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심는대로 거둔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심는 것을 반드시 이 세상 중에 거두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보상의 개념은, 이 땅에서 심는 우리의 행위에 대한 합당한 판결은 죽고 난 이후의 심판대에서 '공정하게'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온갖 악을 행하면서도 세상적인 복을 다 누리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결국 사후의 심판에서 모든 죄값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너무나 선하게 하나님을 따르며 살았지만 온갖 고통 속에서 힘들게 산사람도 결국 사후에 천국에서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적인 부와 풍요를 누리며 사는 사람은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이 받을 복은 이미 세상에서 다 누렸고, 만일 그들이 자신의 세상적인 풍요에 취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 세상에서 버림받고 비참하게 학대받으면 사는 사람들은 세상적으로는 실패한 인생이지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그분만을 의지하며 천국가는 삶을 소망할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조금 부유하거나 가난하다고, 혹은 조건이 조금 좋고 나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좋은 조건은 영생에는 불리한 조건이고, 세상적인 악조건은 영생에는 호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언제나 공평합니다. 악인과 죄인은 반드시 심판대에서 죄값을 치르고 의인은 천국의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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