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많은 염려와 걱정에 둘러싸여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곤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며 기적 같은 삶을 살아온 드러머 리노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아주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그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인도하심이 있었음을 깨닫게 하는 감동적인 간증으로 가득합니다.
어린 시절, 시련 속에서 피어난 드럼의 꿈
리노 선교사님은 본명 박병기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드러머 리노라는 활동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드럼을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요. 당시 그가 다니던 시골 교회는 교인이 단 세 명밖에 없는 아주 작은 곳이었지만, 누군가가 헌물하고 간 드럼 덕분에 처음으로 연주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경기도 이천의 ‘증포리 요골’이라는 일곱 가구 남짓의 작은 골짜기 마을에서 자란 그는, 드럼을 독학으로 익히며 성장했습니다. 특히 세계적인 박치 수준이었다는 그의 교회 목사님 덕분에 박자를 정확히 맞추는 훈련을 제대로 할 수 있었고, 목사님 전용 드러머로 부흥 성회를 따라다니며 중학교 때까지 독학으로 실력을 쌓아갔습니다.
그는 평창 올림픽과 같은 큰 무대에서도 드럼 솔로 연주를 선보일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춘 드러머인데요. 2018년 평창 올림픽 당시 공식 무대인 ‘라이브 사이트’의 피날레를 한 시간 동안 단독 공연으로 장식했습니다. 드럼은 멜로디가 없는 리듬 악기이지만, 그의 연주는 단순히 리듬을 넘어선 퍼포먼스로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드럼만으로 솔로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사람은 두세 명에 불과하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특별하게 사용하시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의 연주에 삶의 스토리가 녹아들면서 더욱 볼거리가 풍성해졌다고 그는 겸손히 이야기합니다.
예측 불가능한 시련, 실명과 가족의 아픔
중학교 시절, 드럼 실력으로 지역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리게 되면서 리노 선교사님은 멋을 부리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당시 이천에서는 옷이나 다른 멋을 부릴 거리가 많지 않았기에, 연예인들이 쓰던 빨간 테두리 안경에 눈길이 갔습니다. 안경을 맞추기 위해 시력 검사를 받던 중, 그의 시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약시라는 진단을 받기 위해 안과를 찾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곳에서 발생했는데요. 동공 확대 검사 중 의료 사고를 당하여 두 눈의 시신경이 손상되면서 한순간에 실명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실명 판정은 그의 가족에게 큰 충격과 어려움을 안겨주었습니다. 6개월간의 정밀 검사 끝에 시신경 손상으로 인한 시각 장애인 판정을 받았고, 시력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진단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는 빛조차 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습니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심한 알코올 중독자로, 집을 부수고 어머니와 그를 괴롭히며 심지어 폭행까지 일삼았습니다. 어머니는 혼자 힘으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길에서 버섯과 깻잎을 팔며 생활을 꾸려나갔지만, 아버지는 술값을 위해 어머니가 애써 모은 돈을 빼앗아 가는 등 비참한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외아들이 눈까지 보이지 않게 되자, 그의 집은 감사할 조건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어려워졌습니다.
어머니는 독실한 신앙인이셨지만, 그에게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도 깊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를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낳았고, 그에 대한 두려움으로 교회를 찾아가 그를 지워달라고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아버지의 폭력과 알코올 중독에 지쳐 어머니는 그를 두고 잠시 집을 떠나셨습니다. 이 사건은 어린 리노에게 "엄마는 힘들면 언제든 나를 두고 떠날 거야"라는 불신과 상처를 남겼고, 그는 일부러 삐뚤어진 행동을 하며 어머니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찾은 빛, 회복된 시력과 영혼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리노 선교사님은 어머니를 다시금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얼마나 선하고 불쌍한 분인지 깨달았습니다. 밤새 아버지가 집을 부술 때도 이웃들에게 폐를 끼칠까 봐 부인하며 사과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아 화장실조차 혼자 갈 수 없는 무력한 상태에서, 그는 어머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문득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떠난 이후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때 큰 용기를 내어 어머니께 "엄마 사랑하고 감사해요"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고백에 어머니는 오열하며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치셨습니다. 알고 보니, 그의 어머니의 기도 제목은 단순히 아들이 다시 보이게 해 달라는 것뿐만 아니라, 아들이 더 이상 죽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고 우울증과 공황장애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진심으로 마음을 표현하며 감사하는 모습에 어머니는 자신의 기도 제목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며 함께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이 순간, 리노 선교사님에게도 진정한 감사가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을 때 어머니가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달으면서, 그의 기도 제목은 바뀌게 됩니다.
그의 기도 제목은 "하나님, 제 눈이 보이든지 보이지 않든지 상관없이 엄마와 평생 예배하게 해 주세요" 로 변화했습니다. 이처럼 우선순위가 바뀌자 그의 가정에는 감사의 기적이 시작되었고, 진정한 예배가 회복되면서 그에게도 놀라운 기적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시력이 회복된 것입니다. 1년여 동안 눈이 보이게 해달라는 기도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절망의 시간을 보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어머니와 예배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눈에 그림자를 보여주기 시작했고, 조금씩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시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시력이 운전면허를 딸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시신경 손상으로 인한 시각 장애인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현재는 운전면허를 취득하여 장애인 차량을 운전하고 있습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지만, 그는 지금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이 장애인증은 한때 그에게 큰 수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명하는 증명서가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놀림받고 괴롭힘을 당했던 기억은 아픔으로 남아있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장애인증을 들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이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명서"라고 당당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서울 상경과 연예계 활동, 그리고 방황
눈이 회복되자 리노 선교사님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와 함께하시면 눈도 새로 태어난 거지 뭐"라는 생각으로 두려움 없이 아무도 모르는 서울로 혈혈단신 상경했습니다. 방송국이 많은 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방역을 찾아가야 했지만, 시골 사람이었던 그는 방배역으로 잘못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잘못 찾아간 방배역에서 포장마차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우연히 우리나라 1대 음악가인 문영배 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과 평화의 드러머이자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활동했던 문영배 선생님은 당시 막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고, 리노 선교사님을 만나 그를 제자로 키워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학원비가 비싸 한 달 만에 포기하려 했지만, 문영배 선생님의 배려로 무릎을 꿇고 배우며 전문적인 드럼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방송 활동을 시작하며 수많은 가수들의 세션 드러머로 활동하게 됩니다. 당시 3대 기획사 중 하나였던 '서울반 YBM'에 어린 나이에 프로 세션맨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토니 안의 데뷔 무대를 시작으로 J-Dragon, 김정민 등 40팀이 넘는 유명 가수들의 연주에 참여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는 늘 성실하고 겸손하게 임했으며, 남들보다 일찍 현장에 도착하여 정리하는 등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많은 가수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유명해지고 바쁜 생활을 이어가면서 그는 점차 초심을 잃고 거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드럼을 시작한 처음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었으나, 유명해져야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간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결국 그는 교회를 떠나 유흥에 젖어들었습니다. 뒤풀이에서 술을 배우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으며, 밤마다 돈을 벌어 나쁜 짓을 하고 허비하는 등 완벽하게 하나님과 멀어진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담배 세 갑을 피우고, 술에 절어 살며 건강은 급격히 망가졌습니다.
또 다른 시련, 발목 부상과 7년의 고통
하나님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던 중, 그는 기침과 함께 피가 나오는 것을 보고 병원을 찾았습니다. 진단 결과는 늑막염이었습니다.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술만 마시며 몸을 혹사한 결과였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교회로 향했습니다.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자 그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과 함께 자신이 변화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교회에서 만난 온기장이 선교단 선배들과 찬양 사역자들은 그에게 천국과 같았습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리 잘해도 끊임없이 더 나아지라고 요구하며 경쟁 속에서 살아야 했지만, 교회는 달랐습니다.
교회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며 자유함을 추구하는 곳임을 깨달았습니다. 실수를 해도 괜찮다고 위로해주고, 칭찬해주며, 권사님과 장로님들은 치킨을 사주며 예뻐해주셨습니다. 그는 마음이 아름답게 변화하는 것을 느끼며, 옛날 같으면 화부터 냈을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배려하고 용납하는 사람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렇게 기쁨의 자리로 돌아온 듯 보였지만, 또 다른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해외 선교지에서 예배 투어를 하던 중 발을 다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당시 세상 생활을 정리하고 요나처럼 이슬람 문화권으로 가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돌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던 유명 드러머라는 소식에 히잡을 쓴 수많은 현지 팬들이 모였고, 그는 드럼을 치고 선교사님은 말씀을 전하는 방식으로 사역을 진행했습니다. 열흘간의 콘서트 마지막 날, 걷던 도중 갑자기 발목을 접질렀고, 병원에서 검사한 결과 두 발의 인대가 모두 파열되고 연골이 찢어졌으며, 뼈 조각이 복숭아뼈 사이에 박히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습니다. 의사는 인공 연골과 인대 이식 수술을 권했지만, 그렇게 되면 다시는 이전처럼 드럼을 칠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는 젊었을 때 세상에서 돈을 벌고 자신만을 위해 드럼을 쳤는데, 이제 하나님께 돌아와 첫 예배 투어에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는 인공 연골 수술을 거부하고 뼈 제거 수술만 받은 뒤 퇴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믿음을 보시고 한 번에 치유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한 달도 채 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휠체어에서 내려오지도 못했고, 발목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휠체어를 벗는 데 1년, 목발을 놓는 데 또 1년이 걸렸지만, 7년이 지나도록 온전하게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를 따르던 밴드 멤버들은 하나둘씩 그를 떠나기 시작했고, "이제 드럼 못 치는데 그만해"라는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목숨 걸고 올라와 온갖 고난을 이겨내며 쌓아 올린 자리였기에 그는 큰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화는 우울증으로, 다시 공황장애로 이어졌고, 이전보다 더 심한 공황장애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스스로 밀어내고 상처 주며, 심지어는 자해와 자살 시도까지 하며 매일매일을 고통 속에서 보냈습니다.
2017년 1월 1일, 새로운 시작
모든 것을 잃고 혼자 남겨진 듯한 깊은 절망 속에서 그는 2017년 1월 1일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그 해는 세월호 참사 이후 중단되었던 공연과 문화예술 활동이 다시 시작되는 해였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느끼며, 그저 삶을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는 죽어도 아무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 어두운 공간에서 완벽하게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리노야, 나는 너의 삶이 아니라 너를 사랑해. 네가 뭘 잘했다고 내가 너를 위해 죽은 게 아니야. 너 있는 모습 그대로, 너의 존재만으로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 내가 너를 내 자녀 삼았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아버지'라는 단어는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때문에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 되셨다'는 말씀도 이해되지 않았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냐며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자녀됨'의 마음을 받자, 그의 마음속에 죄송함이 밀려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자신을 '가치 없는 사람',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여겼지만, 이제 자신이 예수님의 몸값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자신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몸을 해치거나 쓸모없다고 말해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첫 번째 단계였습니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 적이 없으며, 단지 미신처럼 필요할 때만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고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아버지 사라지게 해 주세요," "우리 아버지 술 끊게 해 주세요," "우리 가족에게 불 지르지 않게 해 주세요," "시력을 돌려주세요," "다시 걷게 해 주세요"와 같은 기도만 해왔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하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나를 구원해 주신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새벽, 그는 생애 첫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저를 이 자리까지 인도해 주시고,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잘못 찾아간 곳에서 선생님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TV에 나와 유명한 분들과 함께하며 말도 안 되는 인생을 살게 하신 주님, 진정한 예배자로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그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삶, 결혼과 아이 '조이'의 죽음
다시 태어난 것 같은 새 삶을 살게 되면서 리노 선교사님은 더 이상 자신의 꿈을 세우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심지어 다시 드럼을 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싶다는 꿈조차 내려놓고, 그저 혼자 있을 때도 주님을 찬양하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놀라운 자리로 세워주기 시작했습니다. 발목을 잃은 상태였지만, 누군가가 찾아와 앨범을 내자고 제안했고, 그는 예전처럼 드럼을 잘 칠 수 없다고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복잡한 연주보다 '쿵빡'치는 단순한 리듬을 더 좋아한다며 그를 설득했고, 그는 자신을 위한 드럼에서 남을 위한 드럼으로 변화하며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앨범은 유명 유통 회사의 메인 페이지에 걸리며 수만 개의 댓글이 달리는 등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그는 20년이 넘는 드럼 인생에서 처음으로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이후 미국 유명 디자이너 안드레아 폼필리오와 패션쇼를 진행하고, 오니츠카 타이어의 메인 곡을 만드는 등 해외에서도 이름을 알렸습니다. 다음 달에는 미국에서 그의 시그니처 드럼 스틱이 제작되었고, 그 다음 달에는 혁신적인 진동 메트로놈 회사에서 그를 세계 톱 3 아티스트로 선정하여 광고 모델로 활동하게 했습니다. 연이어 아시아 어워즈상을 수상하고, 월드 아티스트 세계 톱 50인 명단에 등재되는 등 한 달마다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2017년 1월 1일부터 그 해 말까지 단 1년 만에 그는 아시아 최초, 한국인 최초로 다섯 개의 월드 아티스트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이 모든 놀라운 일들 속에 그는 평창 올림픽 라이브 사이트의 피날레 단독 콘서트를 한 시간 동안 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예명인 'JD 리노'(Jesus Drummer Reno Park, 예수님의 드러머 리노 박)를 소개하며, 자신이 비록 걷지 못했지만 주님이 걷게 하셨고,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보이게 하셨다는 간증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그는 해외로 진출하며 '몸값'도 올라갔습니다.
이 시기, 그는 해외 선교지 카자흐스탄의 오륜 교회 목회자 세미나에서 아내를 만나게 됩니다. 연극 배우로 참석했던 아내와 한 달 만에 교제를 시작하며 혼인 신고를 하게 된 배경에는 다급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기획사와의 분쟁으로 통장이 압류되고 전 재산을 잃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해외 선교사님들과 유학생들을 위한 코스타 행사의 강사로 초빙되어, 변호사비로 모아둔 전 재산을 코스타 비용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은 커플은 함께 방을 사용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취소 불가능한 저가 항공권 때문에 난감해하던 그에게 아내는 "그럼 결혼하면 되지"라며 먼저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아내는 이미 투석을 하다가 언니의 신장을 물려받은 귀한 집 막내딸이었기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미안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진심에 그는 만 원짜리 택시비로 거슬러 받은 4천 원으로 편의점에서 가장 싼 미니 케이크를 사서 아내에게 프로포즈했습니다. 그는 당시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예배를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분명히 자신을 사용하실 것이니 조금만 힘내자고 아내에게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4천 원짜리 케이크로 프로포즈한 그는 아내와 혼인 신고를 하고 코스타 행사에 함께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 후 3년이 지났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아 난임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난임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지만, 결혼 후 아이를 가질 확률이 0.005%에 불과하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아내 또한 신장 이식 경험으로 몸이 약해 시험관 시술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3년 반 만에 자연 임신이라는 기적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습니다. 수억 원의 빚을 몇 년 만에 다 갚고 다시 일어서며 아이를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매일 세네 번씩 태교 일기를 쓰고, 초음파 기계를 사서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는 등 지극한 사랑으로 아이를 기다렸습니다.
임신 23주가 지났을 때, 아내의 자궁 경부가 짧아져 조산기가 있다는 진단을 받고 자궁 경부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내는 면역 억제제를 복용해야 했지만, 항생제 투여를 위해 면역 억제제를 끊어야 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아이를 살리느냐, 아내의 신장을 살리느냐 하는 기로에서 그들은 아이를 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한 달 내내 면역 억제제를 끊고 수술을 버텨냈습니다. 병원에서는 이제 아이가 나와도 의학적으로 살릴 수 있다고 했고, 그는 안심하며 평택에서의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예배에 들어가기 5분 전, 아내가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양막이 터져도 아이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그는 마음을 놓았습니다. 하지만 예배에 막 올라가려는 순간, 다시 전화가 왔고 아이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몸을 거꾸로 세운 채 수술을 받는 상황에서도 그와 통화하며 "여보, 예배는 드리고 왔으면 좋겠다. 우리 조이에게 자랑스러운 믿음의 아빠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습니다. 아내는 6시간 안에 분만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가 예배를 마치고 올라오면 4시간 정도가 지날 터였습니다. 그는 아내의 뜻대로 예배에 올라섰습니다.
그날은 추수감사주일이었습니다. 그는 한 달 내내 수술 때문에 정신이 없어 추수감사주일인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늘 순결하고 가장 소중하며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고 기도해왔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들의 아이 '조이'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배 강단에서 당당하게 선포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조이를 하나님의 손에 온전하게 드리겠습니다. 생명의 주권은 주님께 있고, 이제 더 이상 왜 이런 어려운 일이 우리에게 있는지 묻지 않을게요.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사랑하는 조이를 하나님 손에 온전하게 드릴 테니, 저에게 다음 세대를 주십시오. 이제 제가 가진 모든 달란트를 다 써서라도 다음 세대 복음 전하는 데 인생을 살겠습니다."
깊은 슬픔 속 위로와 새로운 사명
예배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그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내는 혼자 있는 분만실에서 유튜브로 예배를 함께 드렸으며, 그가 조이를 하나님께 드릴 때 자신도 함께 "아멘"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고난이 되지 않기를 바랐고,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준 많은 사람들이 낙심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서울에 도착해서 아내는 분만을 시작했고, 그녀는 신장 때문에 약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이미 지쳐있었기에 죽은 아이를 분만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수축제를 계속 투여했지만 아이는 나오지 않았고, 그는 아내의 손을 잡을 수도 없는 채 멀리서 혼자 울부짖는 아내를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때 그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우리 아내를 살리고 싶지만, 그리 하시지 아니하시더라도 저 예배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강당 앞에서 했던 말, 다음 세대를 위해 복음을 전하겠다 했던 말, 저 지킬 거예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더라도 저는 제가 하나님께서 선포한 것을 지키겠습니다." 얼마 후 의사가 아가를 포대에 싸서 조용히 나갔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아이를 마주해야 했습니다. 온기가 남아있는 아이의 작은 손발을 보며, 그는 그동안 해주지 못했던 야곱의 축복을 불러주었습니다.
3일 뒤, 아이를 화장하고 유골을 들고 갈 곳이 없었습니다. 사산한 산모는 산후조리원에서 받아주지 않았고, 아이를 위해 준비했던 아기 신발 등 물건들이 가득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아이의 유골을 들고 선교지로 떠났습니다. 후쿠오카에 있는 장로님의 배려로 따뜻한 호텔에서 지내다가, 예정된 선교지 제주도로 향했습니다. 제주도에서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그들을 보며 함께 울어주었고, 그들은 아이의 유골을 제주도 앞바다, 둘만 아는 추억의 장소에 뿌려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이를 뿌려주는 순간, 하늘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시듯 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를 뿌려주기 전날 저녁, 그의 아내는 SNS에 이지 목사님의 설교 클립 중 "우리가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더 이상 이해시켜 주지 않으셔도 돼요. 우리는 이해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라는 구절을 올렸습니다. 다음 날, 그들은 제주도 서귀포에 예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비게이션을 켰는데, 놀랍게도 그들이 머물던 곳 바로 뒤 언덕에 있는 작은 커피숍에서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이지 목사님이 계셨고,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로하신다고 느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지 목사님은 예배를 잠시 멈추고 그들의 가정을 위해 기도해주셨고, 기도 중 "이 가정이 이제는 이해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겠다고 하였사오니"라는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 같은 강렬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아내와 그의 마음속 깊이 박혔던 쓴 뿌리가 치유되었습니다. 아내는 불편한 자리에서는 식사를 잘 하지 못했지만, 이지 목사님의 제안에 치킨을 함께 먹으며 기뻐했습니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내는 휘파람으로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를 잃은 어미가 아이를 뿌려준 날 찬양을 부르며 기뻐하는 모습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세상에 줄 수 없는 평안이 그들 안에 임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아이도 보냈는데 무엇인들 못하겠냐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섬기겠다는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그들은 아이를 뿌려주었던 대평포구 앞바다에서 아내와 함께 침례를 받고 문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아내를 위한 신장 기증, 그리고 또 한 번의 기적
리노 선교사님 부부가 문화 선교사의 삶을 살아가던 중,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보내고 나서 신장이 다시 나빠져 응급 투석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아내는 면역 억제제를 끊고 한 달간 세 번의 수술을 받았던 터라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신장을 아내에게 기증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혈액형이 달라 기증이 어려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혈액형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매칭이 되어 신장 기증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뻤지만, 아내는 그의 건강을 걱정했습니다.
리노 선교사님은 죽상경화증으로 혈관이 50% 이상 막혀 있었고, 혈액을 묽게 하는 약을 복용 중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수술을 받으면 위험할 수 있으며, 약을 끊어도 위험하고 먹으면 수술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내는 계속해서 의사에게 그의 위험성에 대해 들었지만, 그는 "왜 미래에 있을 일을 자꾸 두려워하냐? 우리는 아직 끝난 거 아니지 않냐? 나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도 쓰임받겠고 죽어도 쓰임받겠으니 두려워하지 말자고 아내를 설득했습니다. 신장 이식 후에도 대개 15~20년 정도만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지 다시 꿈을 그리자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그의 말에 따라 "하나님, 제 몸을 고쳐 달라는 기도 대신 저희 영혼을 고쳐 주십시오. 문제는 저의 몸이 아니라 저의 영혼이었던 것 같습니다" 라며 기도 제목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수술을 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아주 튼튼하게 회복되었습니다. 리노 선교사님은 현재 보름밖에 안 되었지만, 수술 다음 날부터 진통제를 끊었습니다. 수술 당일에는 너무 아파 2년 동안 못 걸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준 많은 이들의 힘을 느끼며 통증이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 수술 부위를 착각할 정도로 통증이 없었으며, 수술 다음 날부터 2~3km를 걷는 등 놀라운 회복력을 보였습니다. 병원 관계자들도 그의 회복 속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나눔과 비전, 그리고 '천사들'의 도움
그들은 어려운 시기에도 헌금을 드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돈을 벌지 못할 때도 '쓴돈'에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아내가 어디를 다녀오면 헌금함에 동전을 넣으며 오늘 누구와 밥을 먹고 왔으니 십일조를 드린다고 말했던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이번 신장 이식 수술비로 약 3천만 원이 예상되었지만, 그들은 수술비를 다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수술 전, 십일조를 먼저 드리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는 3백만 원을 아이들 복음 전파 캠프와 어려운 교회에 기부하고, 나머지 1백만 원은 자신들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돕고 싶어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에 기부했습니다.
수술 다음 날, 그는 계좌번호를 알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이 수술비를 걱정하며 찾아왔습니다. 성공한 지인들은 큰 금액을 줄 수 있었지만, 그는 병원비 충당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소액만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한 장로님은 비행기를 타고 직접 병원까지 찾아와 1백만 원을 봉투에 담아 건네며 "이 작은 돈으로 어떻게 하려 하시냐"고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대로 모든 병원비를 채워주셨을 뿐만 아니라, 3개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생활비를 채워주셨습니다. 그는 엘리야가 광야에서 천사들을 통해 공급받았던 말씀을 떠올리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도 천사들을 보내주셨음을 고백했습니다.
처음에는 병원비가 없어 수술 못하는 친구들, 투석 중인 친구들이 많기에 자신의 간증이 혹시 그들에게 낙심이 될까 봐 염려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껏 자랑하자. 혹시나 절망에 있는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예배 자리에 나올지도 모른다"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당당하게 "하나님 살아계십니다!"라고 외칩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에게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음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첫 번째 소망은 사산 환자들을 돕는 것입니다. 자신도 경험했듯이, 사산 후에는 산후조리원에도 들어갈 수 없고, 아이를 잃은 슬픔 속에서 길을 헤매다가 정신병에 걸리거나 자살 시도를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만나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신장 이식 환자들을 돕는 것입니다. 기증자가 있어도 수술비가 없어 수술을 받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다는 것을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에서 알게 되면서, 그들을 돕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사역의 통로가 열렸음을 깨달으며, 앞으로는 아이들의 교육 과정도 많이 돕고 싶고, 자신이 가진 모든 달란트를 다 사용하고 싶다는 비전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믿음의 여정
리노 선교사님은 이 모든 경험을 통해 깊은 묵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장 이식 환자들이 면역 억제제를 먹어 남의 신장을 최대한 오래 살리려 노력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는 하나님의 새롭게 하심에 우리가 면역성이 있으면 안 되겠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의지가 들어가면 하나님의 온전한 마음을 밀어내게 되므로, 자신의 의지가 완전히 없을 때 온전하게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 안에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배에 타고 있었음에도 풍파 속에서 두려워했던 모습과, 예수님이 무리를 걸어오는 모습을 보며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는 항상 "내가 드럼을 잘 쳐서 예배해야지," "선교지에 가서 뭘 해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이번 기회에 자신에게 믿음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의 열매는 '믿음'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야만 평안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두려웠던 이유는 잃을 것이 많을수록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간절히 원할 때 아이를 잃을까 봐 두려워했고, 잘나가던 시절 발목을 다쳐 드럼을 못 치게 될까 봐 두려워했으며, 눈이 안 보일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사람이었기에, 이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고난처럼 보일 수 있는 자신의 신장 기증조차도, 그는 축복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저희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평안하게 쉬고 있어요. 두 다리 뻗고 돈 걱정 안 하고 아내와 매일 아침밥 먹으면서 얼굴 보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저희에게는 응답받은 것밖에 기억이 안 나요." 그는 이러한 고난은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그 안에 평안을 주시는 특권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한마디 하시면 모든 것이 정리된다는 것을 믿으며, 자신의 소망이 커져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리노 선교사님은 하늘에 있는 사랑하는 아들 조이에게 영상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랑하고 보고 싶은 우리 조이, 아빠가 널 만나기 전에는 많이 방황했고 예수님을 알면서도 알지 못한 인생을 살았어. 하지만 조이를 갖게 되면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심을 알게 되었어." 그는 조이 한 명을 통해 수많은 아이들이 일어나는 역사들을 보았고, 천국에 갈 때까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존경할 만한 믿음의 가장으로, 아내를 가장 사랑하는 아빠로, 아이들을 가장 사랑하는 어른의 모습으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의 겉사람은 날아지나 속사람은 능력으로 새롭게 된다는 말씀처럼, 고난 가운데서도 두려움 없는 믿음을 주셨음을 보았습니다. 박 목사님은 리노 선교사님 부부가 더 이상 아픈 일을 겪지 않고, 기쁘고 행복하며 감사한 일들만 가득하도록 기도하겠다고 말하며 방송을 마무리했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가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온전한 믿음을 갖게 하는 길이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파송된 곳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울어주며, 그들의 눈높이를 맞춰 복음을 전하는 문화 선교사로서 더욱 활발하게 활동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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