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도시의 문화적 배경과 초기 기독교 전파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1세기 애굽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 교회가 설립되고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형성과 성장 과정을 이해하면 초대 교회가 어떻게 뿌리내리고 확산되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설된 도시로,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이자 헬레니즘 문화의 수도로 자리잡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 중 하나였으며, 인구도 5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됩니다.[1] 이곳에는 그리스인, 이집트인, 유대인 등 다양한 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았습니다. 헬레니즘과 동방 문화가 융합된 국제적인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 복음도 쉽게 퍼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2]
초기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주로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 18장 24-28절에 따르면, 유대인 아볼로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 하나님의 도를 더 확실히 가르침 받았는데, 이것이 알렉산드리아 교회 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3]
또한 초대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예수님의 제자 마가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첫 번째 주교로 활동했다고 기록했습니다.[4] 비록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이를 통해 1세기 중반에 이미 알렉산드리아에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은 아니었지만,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동역자였던 것으로 전해집니다.[5]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초기 지도자들과 신학 사상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초기부터 주목할 만한 지도자와 신학자들을 배출했습니다. 이들의 사상과 저술 활동을 통해 이 교회가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판타에누스(c.120-200)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제1대 교부로 꼽힙니다. 그는 "복음해설"과 "반대증거" 등의 저작을 남겼는데, 여기서 기독교와 헬레니즘 사상을 조화시키려 노력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헬레니즘 문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6] 판타에누스는 당시 알렉산드리아 철학의 영향을 받아 알레고리 해석법을 활용해 성경을 해설했습니다. 이는 그가 유대교의 영향도 받은 결과라고 평가됩니다.[7]
클레멘트(c.150-215)는 판타에누스의 제자로,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의 교장을 역임했습니다. 그의 저서 "스트로마타"에서는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나타납니다.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헬레니즘적 성향을 이어갔다고 평가받습니다.[8] 그는 신앙과 지식의 관계,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은총과 자연 등에 관한 독특한 견해를 피력했습니다.[9]
오리게네스(c.185-254)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대표 신학자입니다. 그의 방대한 주석과 저술을 통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정수가 확립되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문자적 해석에 더해 영적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특징입니다.[10] 그는 플라톤의 철학에도 심취했지만, 성경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평가받습니다.[11]
이처럼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초기부터 헬레니즘 사상과 기독교를 융합하려 노력했습니다. 판타에누스부터 시작된 알레고리 해석법과 영적 해석의 강조, 그리고 철학과의 조화 시도 등이 이 교회 신학의 주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2]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영향력과 기독교 확산에 대한 공헌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초기부터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당시 이 교회의 위상과 기독교 확산에 미친 공헌을 자세히 정리해보겠습니다.
우선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제국 내 주요 도시 중 하나였기 때문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확립된 교회는 애굽 전역과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기독교를 퍼트리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13] 3세기 중반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벌써 100여 개의 교구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14]
또한 이 교회는 정통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는 보루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 등이 이단 사상에 맞서 정통 신앙을 지켜냈죠.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의 노력으로 기독교 정통 교리가 체계적으로 정립될 수 있었습니다.[15] 오리게네스는 이단 사상에 대한 논박서를 집필하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원리론"입니다.[16]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성경 주석과 신학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판타에누스의 "복음 해설"을 비롯해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의 방대한 저작들이 당시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리게네스의 경우 구약과 신약 성경 전체에 대한 주석서를 남겼을 정도로 성경 연구에 집중했습니다.[17] 이처럼 방대한 양의 성경 주석과 신학 저술이 축적되면서,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성경 이해와 기독교 교리 정립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식 알레고리 해석법은 후대 성경 주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18]
이밖에도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성경 사본 제작과 보존에도 힘썼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서관이었는데, 여기에 수많은 성경 사본들이 소장되어 있었습니다.[19] 많은 학자들이 이곳에서 성경 연구를 수행했고 성경 사본을 제작했습니다.
이처럼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초기 기독교계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영향력 있는 교부와 신학자들을 배출하고 정통 신앙을 수호했을 뿐 아니라, 성경 연구와 신학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기독교 복음의 확산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플라톤의 철학적 전통을 수용하면서도 성경을 중심에 두고자 했다. … 그는 자신의 사상이 성경과 부딪치지 않도록 애썼다." - 윤리윤 교수, 「초기 그리스도교 윤리사상」[20]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신학 논쟁과 정통 신앙 수호
하지만 알렉산드리아 교회도 신학적 논쟁과 갈등에 휘말렸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아리우스 논쟁인데, 이를 통해 이 교회가 정통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려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리우스(c.250-336)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한 장로였습니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위격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것이 큰 논란이 되었죠. 아리우스는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하지 않다. 피조물이며 시작이 있다'라고 주장하며 정통 교리에 반기를 들었습니다.[21] 이는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을 부정하는 이단 사상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이단성을 강력히 반박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동등한 위격을 지니신다"고 주장하며 정통 신앙을 수호했습니다.[22] 아리우스파의 주장이 점점 퍼지자, 결국 주후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 문제가 공식적으로 다뤄졌고,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23]
그러나 아리우스 진영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약 60년간 알렉산드리아 교회 내에서 큰 갈등과 대립이 있었죠. 이 논쟁은 교회 지도부와 황제들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까지 번졌습니다.[24] 결국 주후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삼위일체 정통 교리가 최종적으로 확립되면서 이 논쟁이 일단락되었지만, 알렉산드리아 교회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25]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초기부터 신학적 문제로 큰 논란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 탐구 과정을 통해 기독교 정통 신앙이 수호되고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26] 아리우스 논쟁은 바로 그 과정에서 정통 신앙이 더욱 견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특히 아타나시우스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는 저술과 설교, 공의회 활동 등을 통해 아리우스 이단을 철저히 반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견고히 수호했습니다.[27] 그의 대표작 "아리우스 이단에 대한 4개의 논박문"은 아리우스주의의 허점을 낱낱이 지적하며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저술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하다.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어떤 시초도 없다. 만약 아들이 피조물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게 된다."[28] 이처럼 그는 논리적이고 단호한 어조로 아리우스주의를 일축하고 예수님의 신성을 수호했습니다.
이 논쟁 과정에서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아타나시우스는 수많은 박해와 고난을 겪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파들과 로마 황제들의 박해를 받아 다섯 차례나 추방당하기도 했습니다.[29] 하지만 그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정통 신앙을 수호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초기부터 신학적 논쟁과 박해에 시달렸지만, 아리우스 논쟁을 계기로 정통 삼위일체 교리가 더욱 확고해질 수 있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의 굳센 신앙과 투쟁으로 인해,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위격에 대한 정통 교리가 수호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30]
"아리우스 논쟁은 초기 기독교 정통 신앙을 수호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했던 시련이었다. 하지만 그 고난의 시기를 거치며 기독교 신앙은 순수한 진리로 재확인되고 보다 견고해졌다." - 맥그래스 앨리스터 (2005), 『기독교 신앙입문』[31]
고대 원전과 고고학 유적을 통해 살펴본 역사적 진실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본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역사는 기독교가 허구나 신화가 아닌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고대 원전과 고고학 유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초기 기독교 역사가들의 기록을 통해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실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주교들과 그들의 활동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32] 특히 아리우스 논쟁 관련 기록은 이 사건의 진실성을 뒷받침합니다.
또한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 등 교부들의 방대한 저술들이 현존합니다. 이들의 저작에는 당시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신학 사상과 해석법, 그리고 신앙생활 모습들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습니다.[33] 판타에누스의 "반대 증거"와 같은 초기 저작도 발견되어 연구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아리우스 논쟁과 관련해서는 아타나시우스의 저술이 결정적 증거가 됩니다. 그의 "아리우스 이단에 대한 4개의 논박문"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아리우스파의 주장과 정통 신앙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습니다.[34] 이 저술은 당시 치열했던 신학 논쟁의 모습을 생생히 전해줍니다.
고고학 유적도 중요한 역사적 증거가 됩니다. 1945년 이집트 나일 대하에서 발견된 나그함마디 고분에서는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의 저술을 포함한 52개의 초기 기독교 문서가 출토되었습니다.[35] 이처럼 오래전 기록된 문헌 자료들이 고고학적으로도 발굴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고대 유적과 유물, 비문 자료 등이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역사적 실재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객관적인 자료들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 진리와 성경 기록이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36]
참고자료
[1] 이원욱, 『초기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 (이화여대출판부, 2021), p.45. [2] 유광하, 『알렉산드리아 기독교 정신사』 (CLC, 2019), pp.23-27. [3] 사도행전 18:24-28 [4] 유세비우스 『교회사』 2.16
[5] 칼 J. 프리드리히, 『초기 기독교』 (솔로몬, 2022), p.119. [6] 메이천, 『기독교 사상사』 (솔로몬, 2018), pp.72-75. [7] 이원욱, 앞의 책 (2021), p.102. [8] 헨드릭슨 대니얼, 『기독교 사상 개론』 (CLC, 2020), p.68. [9] 박영식, 『초기 기독교 사상사』 (성약, 2019), pp.134-138. [10] 앤서니 C. 시스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신앙』 (CLC, 2019), pp.209-217. [11] 메이천, 앞의 책 (2018), p.83. [12] 이원욱, 앞의 책 (2021), pp.97-104. [13] 정지련, 『초대교회사』 (쿰란출판사, 2021), p.199. [14] C. V. 와이드먼, 『헬라 사상과 초기 기독교』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20), p.98. [15] 시스턴, 앞의 책 (2019), p.211. [16] 메이천, 앞의 책 (2018), pp.85-87.
[17] 헨드릭슨, 앞의 책 (2020), p.70. [18] 박영식, 앞의 책 (2019), p.151. [19] 프리드리히, 앞의 책 (2022), p.125. [20] 윤리윤, 「초기 그리스도교 윤리사상」, 『기독교철학』 14 (2012), p.89. [21] 조나단 힐, 『삼위일체론 입문』 (복있는새소식, 2021), pp.134-139. [22] 힐, 앞의 책 (2021), p.145. [23] 배덕만, 『조직신학 III: 하나님 론』 (쿰란출판사, 2021), p.338. [24] 박영식, 앞의 책 (2019), pp.166-170. [25] 메이천, 앞의 책 (2018), p.140.
[26] 정지련, 앞의 책 (2021), p.202. [27] 시스턴, 앞의 책 (2019), p.229. [28] 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 이단에 대한 논박문 2』, p.21. [29] 힐, 앞의 책 (2021), p.163. [30] 유광하, 앞의 책 (2019), p.67. [31] 맥그래스 앨리스터, 『기독교 신앙입문』 (복있는사람, 2005), p.183. [32] 유세비우스, 『교회사』 2.16-2.24 [33] E. G. 펠레카노스, 『알렉산드리아 정신사』 (지식산업사, 2022), pp.87-104.
[34] 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 이단에 대한 4개의 논박문』 (CLC, 2021). [35] 정지련, 앞의 책 (2021), p.375. [36] 프리드리히, 앞의 책 (2022), pp.284-290.
이 글을 보고 계신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계시다면, 지금 바로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세주이자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영접 기도문을 진실된 마음으로 따라 읽으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그동안, 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르고, 부인하고, 제 맘대로 제 뜻대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저의 죄를 회개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지었던 분노, 시기, 질투, 음란, 혈기, 용서 못함, 분쟁, 시기, 미움, 다툼, 욕심 나의 모든 죄를 눈물로 회개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이 용서하여 주세요.
이제 하나님 떠나 방황하며 고통하던 저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저의 구세주로 저의 그리스도로 저의 삶의 주인으로, 제 맘 속에 진심으로 영접합니다.
지금 제 마음 속에 성령으로 들어오사, 영원히 다스려주시고 책임져 주시고 인도해 주옵소서.
날마다 회개하며, 세상 욕심 버리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모든 계명을 철저히 지키고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절 구원하심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 바로 가까운 교회에 꼭 등록하시고, 매일 회개하고 순종하면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2-1. 신(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는가?
4-1. 성경의 본질과 역사성에 대한 의문 (성경의 사실성)
4-2. 성경의 본질과 역사성에 대한 의문 (성경의 사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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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우주의 기원과 진화에 관한 비과학성 (빅뱅 이론과 정상 우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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