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이 새벽에도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성도님들,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귀한 성도님들, 마음과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와 기쁨이 가득 차고 넘치시길 축복합니다. 저희 부 교육자들이 계속해서 갈라디아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갈라디아서 2장입니다. 2장에 보면, 14년 후에 바울이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증거합니다.
또한 이렇게 올라가게 된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올라가게 된 것임을 1절과 2절에서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우리 1절과 2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다름질하는 것이나 다름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아멘.
사실 이 본문의 배경은 사도행전 15장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공의회입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이 함께 참석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본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이 1절과 2절 말씀을 통해서 그것들을 유추해볼 수 있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계시에 따라, 자기의 의지에 따라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기 위해 올라갔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할례보다 중요한 것
그러면서 바울은 “디도를 억지로 할례 받지 않겠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방인인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문제가 무엇이냐면,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 할례를 받아야 율법을 그대로 행해야 구원받는다.”라는 사상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할례를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지 않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까닭을 이야기합니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었다.”라고 4절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고백할 때 온전히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지, 할례를 받고 그 율법을 행한다고 해서 구원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바울 일행들은 계속해서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짓 형제들은 계속해서 할례를 강요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복종하지 않았다고 5절 상반절에서 증거합니다. 5절 상반절에 보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일 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일 시도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디도에게 계속 할례를 요구하지만, 바울은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 거짓 형제들의 말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이는 결국 복음의 진리를 분명하게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도 5절 하반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아멘.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디도의 할례 문제에 있어서 그들이 계속해서, 거짓 형제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분명히 5절에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5절을 보면, “그들에게 우리가 일 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아멘. 복음의 진리가 너희 가운데 있게 하기 위해서, 디도에게 할례를 요구했던 것들을 다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직분 인정
말씀을 계속해서 보시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등장합니다. 야고보, 게바, 요한이 등장합니다. 이들이 바울에 대해서 인정합니다. 무엇을 인정하냐면,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직분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친교의 악수를 나누었다고 성경은 오늘 본문에서 증거합니다. 그리고 구제에 힘쓰기를 원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요청을 바울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바울도 이야기하기를, “나도 그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나도 중심에 두고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말씀이 10절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아멘. “나도 본래부터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면서, 구제하는 일들, 도와주는 일들을 분명히 했다. 나도 그것에 공감한다. 행하겠다.”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이 지금 제가 서두에서 줄거리를 간략하게 이야기했는데, 1절에서 10절까지의 내용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이제 계속해서 내용을 보시면, 바울은 안디옥에서 할례자들을 두려워해 피했던, 그리고 진리를 행하지 않고 도망쳤던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또한 사람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 말씀이 16절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6절 말씀, 한번 좀 길지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아멘. 율법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 오직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신, 믿음 안에서 사는 삶
이어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속에서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며, 이제는 자신은 믿음 안에서 산다고 고백하면서 이 말씀들을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20절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20절 말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멘.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라고 말씀하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넘어지게 됩니다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사실 중요한 기독교 교리나 여러 가지 부분에 있어서, 말씀에서 정말 중요한 말씀, 구구절절이 다 중요한 말씀인데, 특별히 오늘 이 새벽에 좀 깊이 있게 묵상할 부분은 11절에서 14절에 언급되는 말씀입니다. 즉, 바울이 게바를 책망하는 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깨닫게 되는 영적인 교훈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을 두려워하면 넘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증거합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느 날 이방인이 많은 안디옥 교회에 방문했습니다. 안디옥에 방문했지요. 그때가 언제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베드로는 그곳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의미였습니다. 너무나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식사를 같이 하면,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낮은 사람과 같이 식사하면 자신도 낮아지고, 죄인과 식사하면 자신도 죄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이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방인처럼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에서 베드로는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자,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왜 베드로가 이러한 행동을 했을까요?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이미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통해서 누구에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특별히 이방인 가운데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 사건이 있습니다. 이미 그것을 경험했던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복음이 아니고, 열방을 향한 복음인 것임을, 분명히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의 눈치를 본 베드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 누구냐면, 바로 사도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평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팽배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선민사상입니다. 자기들만 구원받는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구원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이방인에게도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음의 역사가 그들에게 임하기를 원했던 그 마음이, 예수님과 하나님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베드로가 몰랐느냐?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 이러한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12절에서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할례자들을 두려워해서, 사람들을 무서워해서 그 자리를 떠나갔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시 야고보는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운 야고보’라고 불렸습니다. 시대적으로 보았을 때, 유대인들이 몹시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야고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은 유대인 신자이고, 더불어서 율법을 중요하게 지키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정말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을 이들입니다.
만약 그들이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을 보았다면,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여서, 베드로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을 너무나도 두려워해서 슬금슬금 빠져 버린 것입니다. 피해 버렸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람의 눈치를 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또한 베드로 자신만 넘어지면 다행인데, 자신뿐 아니라 함께한 유대인들, 그리고 성경은 바나바까지 외식에 빠지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통해서, 행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죄악 가운데 빠지게 되었던 그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위선
그런데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만 슬금슬금 빠져서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았을 때, 함께한 이들은 어땠을까요? 그리고 이방인들은 어땠을까요? 너무나도 서운했을 것입니다. “참 얄밉다, 정말 얄밉다.”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베드로는 이방인과 이렇게 식사를 해 놓고서,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그들과 식사하지 않은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바울이 베드로를 향해 다음과 같이 꾸짖습니다. 14절 하반절에 보면, 제가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유다인이면서 유다인 같이 살지 않고 이방인과 같이 사는 당신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증거합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유대인이면서도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는 이방인과 같이 식사하면서, 이방인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갑자기 이방인이 할례를 받지 않으면 같이 식사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신앙이 흔들려 버렸던 것입니다. 이방인을 유대인처럼 살게 하려고 한다는 뜻이 그 말씀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즉, 이것을 좀 쉽게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 바로 베드로의 본래적인 행동이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지금 하는 행동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원래의 본래적인 행동과 지금 행동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던 것입니다. 사람을 무서워해서, 앞뒤가 바뀌고 말았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 모습이 오늘 본문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깨어 있으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을 두려워하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의식하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늘 삶의 자리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분이 함께 하심을 믿고, 두려워하며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넘어지지 않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을 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면, 결국 그 신앙생활은 실수투성이가 될 것이고,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사람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을 먼저 의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본문 속 베드로처럼, 외식하는 자, 위선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하나님의 복음 앞에 신실하게 서 있기를 바랍니다. 늘 자신을 쳐가면서, 사도 바울이 복음 앞에 굴복하면서 자신을 쳐가면서, 부단하게 늘 깨어서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서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잊지 말 것은, 율법과 전통을 중시하기보다, 우리가 더 신경 써야 할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은혜를 중시하면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그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새롭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잊지 마십시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두려워하면,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말씀이 잠언 29장 25절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아멘.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지만,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게 된다고 분명히 잠언에서 말씀합니다. 그 말씀들을 기억하시면서, 오늘 하루도 힘차게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책망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두 번째로, 오늘 게바를 향한 책망의 모습 속에서 얻는 두 번째 교훈은, 바로 책망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가 14절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그래서 나는 그들이 기쁜 소식의 진리대로 바로 살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에게 ‘유대인인 당신이 이방인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방인에게는 유대인답게 살라고 할 수 있습니까?’하고 책망했습니다.” 이렇게 증거합니다.
본 절에서 사도 바울은 베드로의 그릇된 행동을 공개적으로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교회의 최고 지도자에 대해서, 당시에 정말 대사도였으니까요, 최고 지도자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책망한다, 꾸짖는다는 것은 여간 담대한 믿음을 갖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로 힘든 일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바울 역시 베드로처럼 주님의 직접적인 위임을 받아 사도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택정함을 받고,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으로 서 있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의 용기, 사랑의 마음
바울 역시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주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어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베드로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의 말씀을 좀 떠올려 보시면 어떻습니까? 그가 설교를 했을 때, 3천 명이, 또 5천 명이 믿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그런 역사를 베풀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도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런 역할들을 감당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정말로 그 시대 가운데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이 베드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이 베드로였는데, 이 베드로가 공개적인 장소에서 공격을 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책망하고 꾸짖을 때에는, 이 바울의 마음 가운데 사랑의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시기 바랍니다. 저들 때문에 흔들리는 그 성도들을 향한 사랑, 그러면서도 베드로를 향한, 대사도 베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서 분명한 말로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했습니다. 실로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영향력 있는 베드로를 향해 책망했기에,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하지 않았겠습니까? 분명히 엄청나게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사역을 하는데 큰 어려움을 당했을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책망하고 있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서 베드로의 그 잘못된 행위, 외식하는 것, 그리고 남들을 유혹에 빠뜨린 것, 자신만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지으면 되는데, 함께하는 공동체를 완전히 흐트러 버린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바울보다 더 큰 일을 한 사람, 베드로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바울이 책망을 했다는 것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용기를 내어서 바른 말을 했다, 말씀의 근거에 의해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이야기했다,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그것보다 더 큰 일을 했다, 바울보다 더 큰 일을, 더 큰 용기를 발휘했던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누구냐면 바로 사도 베드로였다는 것입니다. 바울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역시 베드로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한 바울의 그 책망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책망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물론 성경에서는 그가 바울의 책망에 대해서 어떠한 반응을 나타내는지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에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베드로가 이 책망, 바울의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바울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방해했을 것입니다. “어디 감히 나를 이렇게 해?”라며 계속해서 괴롭혔을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의 겸손
그런데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바울에 대해 호의적이었습니다. 호의적이었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씀이 어디 있느냐? 베드로후서 3장 15절에 보면 이렇게 증거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아멘. 이렇게 증거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쓴 서신에서, 바울을 향해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무엇을 분명히 증명해 줍니까? 그가 자신을 향한 바울의 책망을 겸허하게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에 대해서 돌이켰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향한 책망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 그리 쉬운 일일까요?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그것은 어떤 용기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큰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책망하면 화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감히 나에게 이렇게 지적한다, 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잘했다고 할지라도, 또 아무리 못했다고 할지라도, 누군가가 나에게 있어서 계속해서 지적하고 지적한다면,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겸허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겸손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실로 수제자다운, 수제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베드로의 그런 신앙의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겸손의 신앙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우리 주님이 원하십니다.
신앙의 진보를 이루는 길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누군가에게 조언을 받을 때가 있고, 책망 아닌 책망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말씀에 근거해서, 성도님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권사님,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잘못된 것 아닙니까?”라고 이렇게 권면하고, 때로는 ‘지적질’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겠지만, 그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졌다면, 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이게 옳다’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정하고 살아갈 때, 우리 신앙에 있어서 진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자리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은 무엇입니까? 말씀 안에서 변화된 삶입니다. 이기적인 자아를 내려놓고, 변화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서부터 그런 일들이 일어나야 할 줄 믿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기대하시면서, 삶의 자리에서 부단히 깨어서 기도하시고, 또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의 잘못된 점은 없는지 점검하시는 오늘 하루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축복합니다. 아멘.
이 글을 보고 계신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계시다면, 지금 바로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세주이자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영접 기도문을 진실된 마음으로 따라 읽으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그동안, 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르고, 부인하고, 제 맘대로 제 뜻대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저의 죄를 회개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지었던 분노, 시기, 질투, 음란, 혈기, 용서 못함, 분쟁, 시기, 미움, 다툼, 욕심 나의 모든 죄를 눈물로 회개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이 용서하여 주세요.
이제 하나님 떠나 방황하며 고통하던 저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저의 구세주로 저의 그리스도로 저의 삶의 주인으로, 제 맘 속에 진심으로 영접합니다.
지금 제 마음 속에 성령으로 들어오사, 영원히 다스려주시고 책임져 주시고 인도해 주옵소서. 날마다 회개하며, 세상 욕심 버리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모든 계명을 철저히 지키고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절 구원하심을 믿고,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 바로 가까운 교회에 꼭 등록하시고, 매일 회개하고 순종하면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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